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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인생을 사시는 엄마

말까시 2010. 12. 1. 15:57

 

◇ 제2의 인생을 사시는 엄마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부르르 떨렸다. 엄마였다. 낮에 전화하는 일이 없었는데 무슨 일일까. 불길한 예감에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전화를 받아보니 웅성 이는 소리만이 들릴 뿐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난 것이 분명했다. 집 전화로 다시 걸었다. 들리는 목소리는 동네 할머니였다. 엄마가 쓰러져 말이 아눌 하고 몸을 가눌 수가 없다고 했다. 아! 이일을 어찌 한단 말인가. 중풍이라면 죽음 아니면 평생 반신불수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눈앞이 캄캄했다.

 

급히 병원으로 후송해야했다. 동네 할머니는 택시를 타고 읍내 병원으로 간다고 했다. 형과 누나에게 연락하여 빨리 가볼 것을 권했다. 나 역시 일을 접고 급히 시골로 차를 몰았다. 더디기만 한 달구지는 시내를 빠져나가는데 상당한 시간을 허비했다. 핸드폰이 다시 울고 있었다. 중풍은 읍내병원보다는 큰 병원으로 가야한다는 택시기사의 조언에 따라, 119구급차를 이용하여 대학병원으로 가도록 했다. 다시금 가속 페달을 밟았지만 달구지는 느려 터졌다.

 

차안의 공기는 싸늘했다. 갑자기 시야가 흐려졌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 많은 농사를 혼자 일구어 자식 뒷바라지에 혼신을 다하다 보니 이제껏 호강한번 제대로 못했던 불쌍한 엄마였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혼자 쓰러져 얼마나 자식들을 원망했을까. 고단했던 엄마의 일생이 유리창이 스크린 되어 스쳐 지나갔다. 한 번 터진 눈물샘은 뜨거운 눈물을 마구 쏟아냈다.

 

응급실로 가는 길은 무섭고도 두려웠다.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어지럼증이 나타났다. 엄마는 응급조치를 받은 후 중환자실로 옮겨져 있었다. 신음소리를 내면서 가늘게 뜬 눈 주위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천만 다행이었다. 의식을 잃지 않고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눈물이 핑 돌았다. 무엇인가 말하려 했지만 발음은 정확하지 않았다. 뇌출혈로 뇌세포 일부가 망가진 것일까. 손을 잡고 들어보라 했다. 발을 잡고 움직여 보라 했다. 다행히 힘은 없었지만 움직일 수 있었다. 긴 한숨을 몰아쉬면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형과 누나는 이미 도착하여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 하고 있었다. 치료 여부에 따라 최악의 상태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치료가 잘되어 퇴원을 한다 해도 삶은 가시밭길의 연속일 것이다. 평소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밤새 안녕을 입버릇처럼 내뱉곤 했었다. 당신 또한 얼마나 만감이 교차하겠는가. 더 이상 시골에서 일을 할 수가 없는 노릇, 다행히 거동에 지장만 없다면 시골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인데,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혀 돌아갔다.

 

한 달여 약물치료와 재활훈련을 거쳐 두 다리 두 팔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는 상태로 평생을 살아온 고향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있었다. 쓰러지며 달아난 힘은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돌아올 것 같았다. 불편하기만 했던 시골집은 이참에 새롭게 뜯어 고쳐 실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도록 했다. 엄마 혼자 시골집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날 지팡이를 짚고 동네 어귀까지 기꺼이 나와 배웅하는 엄마의 모습에 삼형제는 눈물이 나와 엄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상경하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아 착잡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다가오는 고통은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다. 그 일이 짧고 길음은 내 어찌 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부모를 보내는 아픔을 이미 겪어본 친구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어 혼례라는 큰일도 치르고 슬픔과 기쁨의 눈물을 몰래 감춘적도 있을 것이다. 인생의 참의미는 몰라도 부모자식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는 이미 터득하여 알고 있을 것이다. 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찬바람이 몹시 불 때면 생각나는 고향의 뒤뜰, 그 장독대에서 장을 푸는 엄마의 모습을 오래오래 보았으면 좋겠다.

 

“엄마 밥 잘해먹고 있지.”

“그려 느덜만 잘살면 그만인께 걱정들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