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속에 잠긴 불암산
◇ 구름 속에 잠긴 불암산
금방이라도 한줄기 비를 뿌릴 것 같이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공릉역에는 아침부터 푹푹 쪘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어 오늘 산행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았다. 약속시간이 다다르지 않았지만 이미 많은 친구들이 도착하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불암산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리 잡은 공릉역에는 산사람들보다는 일반복장을 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어디론가 가기 위해 분주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주말 약간은 한가히 보였지만 여전히 생업에 바쁜 사람들은 눈길도 안주고 역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공릉역을 뒤로 하고 골목을 헤치고 나아가 불암산 입구에 도착하니 비가 한 방울씩 떨어졌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빗방울과 땀방울이 서로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면서 시원함이 밀려왔다. 궂은 날씨가 산행에는 지장을 줄지 모르지만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구세주나 다름이 없었다. 계곡에 발을 당구지 않아도 우린 초입부터 벌써 물세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여름산행에서 우중산생의 묘미를 산행 초기부터 맛본 것이다. 촉촉이 젖어 가는 나뭇잎과 발아래 땅에서는 냉기를 먹음은 살랑바람이 일렁였다. 완만하게 시작한 산행은 거친 숨소리를 잠재우고 덕담을 나누기에 아주 좋은 상태로 계속하여 이어졌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 졌다. 우산을 바쳐 든 친구, 비옷을 입은 친구, 그냥 비를 즐겨 맞는 친구, 그 나름대로의 멋은 다양한 모습들을 연출해 냈다. 특히, 여인들의 물먹은 머리는 윤기가 두 배였으며 한걸음 발길을 옮길 때마다 흔들리는 머릿결은 엄마와 같이 산행하는 아이들도 감탄사를 연발했다. 비는 계속하여 땅을 적시고 가고 오는 사람의 발길을 재촉했다. 비덕분에 오르고 오르는 힘든 산행에 잠시 더위를 잊게 했다. 하지만 목마름은 어쩔 수 없었다. 팔각정에는 빈틈없이 사람들이 많았지만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시원한 냉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비와 막걸리는 왠지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았다. 팔각정 안에는 막걸리 향기가 사람과 사람사이를 휘감아 돌았다. 누구랄 것 없이 나누어 마시는 막걸리는 나이를 떠나 금방 친구가 되었다. 우리의 전통술 막걸리는 이제 산행에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성인음료로 자리 메김을 한 것이 분명했다.
정상은 멀었지만 지치고 힘든 친구들이 있어 점심을 일찍 먹기로 했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어 나무와 나무사이에 끈으로 연결하여 비닐천막을 만들었다. 평평한 산등성이에 비닐천막을 치고 나니 아방궁이 따로 없었다. 바리바리 싸가지고 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살짝 들이킨 알코올은 맛있는 대화를 만들어냈다. 점점 세련되고 다양해지는 먹을거리들은 퓨전요리의 진수를 보는 듯 했다. 만들어 나누어주는 음식 속에 담겨진 끈끈한 정이야 말로 남녀 간에 싹튼 사랑보다 더 진할 것이다. 빗방울이 식혀준 시원한 바람은 음식의 맛을 한층 더 높여 주었다.
정상을 바로 위에 두고 벼랑 끝에 자리 잡은 주막에서 막걸리 한잔씩을 들이켰다. 좀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마시고 싶은 욕망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바위를 타고 오르던 길은 나무계단으로 바뀌어 있었다. 술에 취에 발이 후들 거렸지만 날아가는 구름이 잡아주고 난간이 지탱을 해주니 정상을 오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정상에는 자랑스러운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국기봉을 잡고 기념촬영을 하는 사람들은 위태로워 보였다. 사방팔방 절벽으로 둘러싸인 정상은 몸을 낮추어도 불안했다. 구름은 골짜기를 타고 올라 정상을 한 바퀴 휘감고는 빠르게 계곡을 타고 내려갔다.
하산하는 길은 급경사였다. 빗물을 먹음은 바위와 땅은 미끄럽기가 얼음판이었다. 미끄러져 넘어지기 일보직전에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친구들도 있었다. 비는 그쳐 더위가 엄습해 왔다. 시원한 물줄기를 맞고 싶은 생각은 친구와 친구사이로 퍼져 나갔다. 급경사가 완만해지면서 계곡이 나왔다. 오전에 내린 비로 인하여 제법 물이 흐르고 있었다. 웃옷을 벗어던지고 물에 풍덩 들어가 시원한 물세례를 받았다. 시원함과 차가움은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구름이 안개가 되어 숲속을 덮고 푸른 숲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 냈다.
하산의 마지막에서 시원한 약수터로 목을 축였다. 상계역 뒤 골목 얼큰한 닭한마리로 허기를 달래고 나니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었다. 뒤풀이에 합류한 친구들의 지상패션은 등산복을 입은 친구들과 대조되어 새삼 달라 보였다. 맥주와 소주를 번갈아 마신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세상을 잊은 듯 즐거워했다. 술 파티가 계속되는 동안 해는 서산에 지고 어둠을 빠르게 깔고 있었다. 다시 빗방울은 어둠을 가르며 내리기 시작했다. 모자를 벗고 빗줄기를 그대로 맞았다. 술기운에 뜨거웠던 얼굴에 빗방울이 흐르자 시원함과 차가움은 온몸을 파고들어 상큼함의 극치를 느끼게 했다. 늦은 밤 네온사인이 요란한 밤거리에 초점 잃은 눈동자들은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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