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빔
◇설빔 왜 이리 날이 새지가 않는가. 어둠은 길고 길었다. 오직 머릿속은 검정고무신과 때때옷으로 가득 찼다. 설빔으로 갈아입고 자랑할 것을 생각하니 마냥 즐거웠던 것이다. 설맞이 대목장날 엄마가 사온 설빔은 한번 입어보고 그대로 장롱에 넣어져 자물쇠로 채워졌다. 바로 입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새것으로 빨리 갈아입고 싶은 마음에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이 명절이었던 것이다. 어렵고 힘든 세상 새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다. 막내둥이는 계속하여 형·누나의 옷을 대물림하는 바람에 더더욱 없다. 없는 형편에 투정을 부려도 소용이 없다. 모든 것이 장남을 위주로 이루어졌다. 학업역시 마찬가지다. 장차 집안을 이끌어가야 할 기둥인데 잘 입히고 잘 가르쳐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다. 막내는 늘 서글펐다. 엄마의 사랑은 많이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경제적인 혜택은 늘 부족했다. 날이 밝았다. 엄마는 부엌에 나가고 없다. 문 열고 달려가 졸랐다. 장롱 문이 열리고 드디어 설빔이 보였다. 옷이 좋고 나쁨이 없이 오직 새것이란 것이 좋은 것이다. 대부분이 옷을 한번 사면 몇 년은 족히 입어야 한다. 당연이 체격에 비하여 큰 것을 살 수 밖에 없다. 소매를 몇 번 걷어 올려야 손이 보일정도로 길었다. 맞지 않는다고 투정해보았자 혼 줄만 난다. 근검절약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방도가 없는 것이다. 새 옷을 입지 못하는 애들에 비하면 행복한 것이다. 그날은 먹을 것이 많다. 먹고자 하는 애들도 많았다. 차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애들은 달려들었다. 그냥 나두면 힘센 놈이 다 먹게 마련이다. 할머니는 손자들을 줄을 세워 음식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다. 평상시 풀만 먹다가 고기반찬을 보니 식욕이 당긴다. 큰집, 작은집 두루 다니면서 포식하다보니 배가 남산만 해진다. 포만감은 대단할지 모르지만 얼마 안가서 배가 아프기 시작한다. 기름기에 적응이 안 된 몸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화장실을 안방 드나 들 듯 하고 나면 아침에 즐거웠던 기분은 온데간데없다. 정상적인 몸으로 돌아오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흘러야했다. 차례가 끝나고 나면 성묘를 다녀와야 한다. 성묘 가는 일도 보통일이 아니다. 산소는 동네 근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먼 거리를 가야만 한다. 깊은 산중에 있는 것도 많았다. 가는 길 오는 길 오직 걸어야만 한다. 지금은 자가용이 있어 수월하게 다녀 올 수 있지만 그땐 오직 두 다리가 교통수단의 전부이다. 어른들이야 늘 상 걷는 것이 일이지만 애들은 기껏해야 학교 가는 것이 가장 긴 거리다. 가는 길이 힘들고 혹시나 새 옷에 흠집이라도 나면 큰일이 아닌가 싶어 안 간다 해도 어른들의 강요에 의하여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조상에 대한 숭배는 대단했다. 명절에는 객지에 나간 친구들도 많이 온다. 그날 저녁 멋쟁이 형님 누나들은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수다를 떤다. 웃음소리가 울 너머 골목에 합쳐지면 온 동네가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요란하다. 마을전체가 생기나는 동네로 탈바꿈 하는 것이다. 일년 내내 명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풍요롭기만 했던 명절이 이젠 아득한 옛날의 것으로 달아나 버렸다. 평상시나 명절이나 시골은 조용하다. 고향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성묘, 차례도 머지않아 사전 속으로 밀려나지나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과거에 너무 얽매일 수 없는 것이라 하지만 옛것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것을 보면 서글퍼진다. 그래도 명절은 좋다. 쉰다는 것에...
|